
삼성물산에 이어 제일제당까지 계속해서 사업이 성공하면서 병철은 새로운 기업을 하나하나 일으키는 창조의 기쁨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게 됩니다. 그는 인간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를 떠올렸습니다. 제일제당은 ‘식’에 해당하는 사업이었고 이번에는 ‘의’에 해당하는 사업을 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국내 섬유산업의 상황은 아주 열악해서 군용 모포 수준의 제품 정도만 생산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양복은 미군 군복을 염색한 것이었습니다.

마카오를 통해 밀수한 영국제 복지로 맞춘 양복도 있었지만, 일반 월급쟁이의 3달치 월급보다 더 비쌌습니다.

그래서 이 양복을 입은 사람은 마카오 신사라고 불리며 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병철은 일반인들도 값싸고 질 좋은 양복을 입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1954년 9월 15일, 제일모직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런데, “400년 전통 영국 모직과 상대가 되겠어?” “제일제당에서 돈 좀 벌더니 세상이 만만하지?” 등의 싸늘한 반응만 되돌아왔습니다.

회사 내부적으로도 걱정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국내 최초로 모직 공장을 짓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내 경영진은 작은 규모로 시작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병철은 생산원가를 낮추면서도 품질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규모 최신식 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부의 권유로 일본제 기계 대신 서독제 기계를 들여와서 대구 침산동에 7만 평 대지를 확보하여 당시 최대 규모의 최신식 공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 제일모직 소모사 공장 완공을 시작으로 1956년 초까지 방모, 직포, 염색, 가공 공장을 차례대로 완공했습니다.

한편, 공장이 건설되는 동안에도 원모 염색, 가공, 방직, 기계 등의 여러 영역을 담당하는 직원들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 보내 6개월간 관련 기술을 배워오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제일모직은 원단을 생산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골덴텍스’입니다. 비록 영국산 모직만큼 훌륭하지는 못했지만, 국내 최고의 모직 원단임은 분명했습니다.

게다가 영국산 모직의 5분의 1 가격으로 가성비가 뛰어났습니다.

또한 병철은 서울 을지로에 있던 제일모직 사옥 1층에 직접 양복점을 차리고 양복을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이 양복점의 이름을 자신이 좋아하는 꽃인 ‘장미’와 유럽의 양복지를 뜻하는 ‘라사’를 합쳐 ‘장미라사’라 지었습니다.

하지만, 국산품에 대한 불신 때문에 첫해에는 큰 적자를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제일모직에서 생산한 코르덴 텍스 양복을 일부러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역시나 시간이 흐르자 값싸고 품질 좋은 골덴텍스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제일모직의 성공 이후 모직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 생산한 모직만으로 완전 자급이 가능해지자 1958년 1월, 정부는 소모사 수입을 완전 금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이 성공한 이후부터 병철은 재물이 있는 가문, 재벌(財閥)이라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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