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9월 22일, 병철은 사카린 밀수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재계 은퇴를 선언!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 첫째 아들 이맹희를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앉히게 됩니다.
갑자기 할 일이 몽땅 사라진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삼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합니다.
병철은 일본을 자주 오가며 여러 산업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전자 산업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병철은 삼성물산 내에 설치한 개발부를 통해 사업타당성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이미 세계적인 전자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고 대만도 전자 산업의 발전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전자산업은 아직 걸음마 단계였던 겁니다.
사실 금성사, 지금의 LG전자가 1959년 11월에 국내 최초 라디오를 1966년 8월엔 국내 최초 흑백 TV를 만들어 전자 산업을 이끌어가고 있었지만, 그 외 다른 기업들은 해외에서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돈인 구인회의 사업과 겹침에도 불구하고 병철은 전자산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68년 봄, 병철은 안양골프장, 지금의 안양베네스트 골프클럽에서 인회에게 삼성이 전자 사업에 진출할 것이라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윤) 남으니까 할라고 하지?!” 인회는 버럭 화를 내며 병철을 쏘아붙였습니다. 병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민망해하며 골프장을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당시 인회의 셋째 아들 구자학은 삼성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금성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구자학은 현재 아워홈의 회장입니다.
어쨌든 40년 지기 절친이자 사돈인 인회와 갈라서면서까지 전자 사업에 진출하기로 마음먹은 병철은 당시 일본에서 40만 평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장을 가지고 있던 산요전기 공장을 견학 갔습니다.
그리고 산요전기 공장의 엄청난 규모에 병철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산요전기보다 더 큰 규모로 공장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한국으로 돌아와 수원에 45만 평, 경남 울주에 70만 평 등 총 115만 평의 땅을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1969년 1월 13일, 병철은 삼성전자 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며 경영 일선에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사업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산요전기와 협력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 있던 기존 전자 업체들은 이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삼성전자가 하려는 사업은 단지 산요전기의 제품을 가져와서 조립하는 것뿐이며 이는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병철은 TV와 라디오를 생산하여 85%는 수출하고 단지 15%만 국내에 공급할 것이라 했지만, 기존 전자 업체들은 15%도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답이 없었던 병철은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전자 산업을 국가적 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며 설득했고 결국 모든 생산품을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삼성과 산요전기의 합작 투자 사업은 허가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1969년 12월 4일, 삼성전자 50% 산요전기 40%, 스미토모상사 10% 등 투자금 5,000만 달러 규모로 삼성산요전기가 설립되었습니다.
삼성이 출시한 초기의 제품들은 선풍기 목이 쉽게 부러지는 등 불량률이 높아서 상당 기간 적자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차츰차츰 생산 시스템과 전자 기술이 축적되면서 삼성전자는 자체 기술로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1973년 4월, 삼성전자는 첫 번째 자체 제작 제품을 출시하게 됩니다. 19인치 트랜지스터 흑백 TV, 마하 506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부터 삼성에서 생산된 TV는 국내 판매가 가능해지며 삼성전자의 매출은 조금씩 증가했습니다.
그러던 1975년 4월, 선풍적 인기를 끈 초대박 상품이 등장합니다. 바로 흑백 이코노 TV, 지금까지의 TV는 전원을 켜면 브라운관의 전자총이 20초 정도 예열을 한 뒤 켜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성전자의 이코노 TV는 5초 만에 켜졌던 겁니다.
덕분에 1978년에 이르러 이코노 TV는 연간 판매량 74만 6000대를 기록하며, 시장점유율을 40.9%까지 끌어올리며 점유율 1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전자 산업에 기반을 잡게 된 삼성전자는 이 시기부터 LG전자와 본격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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