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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로 개명 [KFC #11] KFC로 개명 [KFC #11] 제가 앞에서 KFC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1991년이 되어서야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이 공식적으로 KFC란 이름으로 바꾸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0년 가량 사용해 온 이 이름을 바꾸게 된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1990년, 켄터키 주에서 갑자기 ‘켄터키’라는 단어를 상업적으로 사용할 경우 주 정부에 라이센스 비용을 지불하게 한 법이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비만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고 프라이드(fried) 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라이센스 비용도 지불하지 않으면서 부정적인 단어도 사용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이질감이 생기지도 않도록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의 이니셜을 따 KFC로 바꾸게 된 것입니다... 2022. 8. 19.
본격 프랜차이즈 [KFC #10] 본격 프랜차이즈 [KFC #10] 불운의 사나이였던 샌더스는 어느새 74살의 나이가 되었고 성공한 프랜차이즈의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매장의 수가 늘어가고 치킨을 교육해야할 사람들도 점점 더 많아지자, 관리해 가는 것이 힘에 부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샌더스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판매 사업으로 성공을 거둔 젊은 사업가 존 브라운 주니어를 만나게 되고 회사 인수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됩니다. 샌더스는 200만 달러의 금액을 요구하게 되는데 브라운은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잭 매시와 함께 공동으로 인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1964년,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은 존 브라운 주니어와 잭 매시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거래에는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었습니다... 2022. 8. 18.
트레이드 마크 [KFC #9] 트레이드 마크 [KFC #9] 1957년 어느 날, 하먼은 자신의 가게를 찾아 온 한 판매원으로부터 바구니를 하나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구매 당시에는 어디에 쓸지 정하진 않았었지만, 하먼은 14조각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과 으깬 감자, 그레이비 소스를 이 바구니에 한꺼번에 담아서 3.5달러에 판매했습니다. 그리고 이 상품 덕분에 가게 매출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하먼은 이것을 페밀리 버킷이라 부르며 홍보했습니다. 당시 주부들은 일주일 중 한 끼라도 식사준비를 쉬기 위해 잘 차려진 음식을 집으로 사가는 분위기가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5달러만 있으면 가족들이 맛있는 치킨 요리를 즐길 수 있었던 패밀리 버킷은 출시되자마자 최고의 인기 메뉴가 되고 KFC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됩니다.. 2022. 8. 17.
유일한 돌파구 [KFC #8] 유일한 돌파구 [KFC #8] 1956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 연방고속도로 체계인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건설을 추진하며 연방도로법을 제정하고 250억 달러의 지출에 승인하게 됩니다. 곳곳에 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미국은 점점 더 발전해 갔습니다. 그런데, 75번 고속도로의 건설이 완료되면서 샌더스의 식당이 위치해 있던 코빈(Corbin)을 지나던 여행객들이 이 길을 우회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손님은 크게 줄어들었고 식당 운영에 타격을 입게 됩니다. 샌더스는 화재로 인해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많은 돈을 빌렸기 때문에 제법 많은 이자를 내야 했지만, 상황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코빈의 식당을 팔아서 갚아야만 했습니다. 66살의 샌더스는 좀 더 여유로운 노년을 꿈꿨지만, 그에게 남은..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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