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돌파구 [KFC #8]
1956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 연방고속도로 체계인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건설을 추진하며 연방도로법을 제정하고 250억 달러의 지출에 승인하게 됩니다.
곳곳에 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미국은 점점 더 발전해 갔습니다.
그런데, 75번 고속도로의 건설이 완료되면서 샌더스의 식당이 위치해 있던 코빈(Corbin)을 지나던 여행객들이 이 길을 우회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손님은 크게 줄어들었고 식당 운영에 타격을 입게 됩니다.
샌더스는 화재로 인해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많은 돈을 빌렸기 때문에 제법 많은 이자를 내야 했지만, 상황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코빈의 식당을 팔아서 갚아야만 했습니다.
66살의 샌더스는 좀 더 여유로운 노년을 꿈꿨지만, 그에게 남은 건 매달 105달러씩 나오는 연금과
하먼으로부터 매달 받는 프랜차이즈 수수료 10달러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의 프랜차이즈 매장을 늘리는 것만이 샌더스가 노년을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프랜차이즈 계약을 위해 105달러의 연금으로 인디애나 주와 오하이오 주를 여행하기 시작하는데, 이 무렵 샌더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얀색 정장을 입었습니다.
샌더스는 인디애나 주 포트 웨이에 위치한 The Hobby House에서 수석 요리사로 일하던 데이브 토마스란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데이브 토마스는 초기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에 있어서 많은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 됩니다.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지역에 4개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매장을 운영중이던 필립 클라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매장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당시 데이브 토마스에게 가게를 맡기면서
회복해준다면 지분의 45%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데이브 토마스는 잘 팔리는 메뉴 위주로 가게를 운영하면서 브랜드 고유의 버킷 디자인을 대형 회전 간판으로 제작해 설치했고 이 마케팅이 성공을 거두며 지분 45%를 받게 됩니다.
이후 이 대형 회전 간판은 전국적으로 보급 되었고 샌더스는 토마스에게 레스토랑 운영에 대한 노하우까지 많이 알려주며 관계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훗날 토마스는 웬디스라는 햄버거 프랜차이즈를 설립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어쨋든 샌더스는 더 많은 프랜차이즈 계약을 위해 계속해서 여행했고 그 거리가 약 20만 마일(32만 km)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1956년 말에는 8군데 정도였던 매장이 1960년도에는 약 200개가 되더니, 1963년에는 600개 이상의 매장에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판매하며 무섭게 성장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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