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를 위해 마을공동체를 만든 회사가 있다? [허쉬 #5]
1898년, 밀턴은 뉴욕의 한 사탕가게에서 만난 캐서린 스위니라는 여성과 결혼을 하여 행복한 가정을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 후 10년이 다 되어 가던 1907년까지도 그들에게 자녀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밀턴과 캐서린은 그 때문에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겁니다. 한편, 밀턴은 직원들의 복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 캐서린과의 상의 끝에 데리 타운십 내에 직원들을 위한 마을 공동체를 구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직원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주택뿐 아니라 학교와 교회, 공원 그리고 마을 내에 교통 인프라까지 말 그대로 허쉬 타운을 형성했습니다.
밀턴은 그 이후에도 허쉬 타운을 더욱 좋은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 수영장, 컨벤션 홀, 놀이공원 등 다양한 문화시설을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직원들이 좋은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곧 허쉬가 성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09년, 자녀가 없었던 허쉬 부부는 가난한 아이들을 돕기 위해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목적으로 허쉬 산업 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좋은 교육, 안정감, 안전함 이렇게 3가지 원칙을 가지고 학생들을 양육했는데, 점차 많은 가난한 아이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1911년, 밀턴은 아내 캐서린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치료를 위해 프랑스와 독일에 머물며 요양하고 있었습니다.
겨울 동안에는 미국을 떠나 있었지만 계속 자리를 비우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평소에 호기심과 모험심이 많던 밀턴은 당시 막 건조된 세계에서 가장 큰 배의 첫 항해에 탑승하여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하게 됩니다.
1911년 12월 18일, 실제로 밀턴이 그 배의 선사인 화이트 스타 라인에 끊은 300달러짜리 수표가 존재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배의 첫 항해는 다음 해 4월이었습니다.
그런데, 1912년 4월 14일,그 배는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밀턴이 탑승하려고 한 그 배가 바로 타이타닉호였던 겁니다.
다행히 밀턴은 미국에 더 빨리 가야 할 일이 생기면서 1912년 4월 6일, 독일 라이너 아메리카호를 타고 미국에 더 일찍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된 많은 이들은 ‘밀턴이 타이타닉을 탔다면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1915년, 아내 캐서린이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고 1945년, 밀턴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들은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수익금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이후 1951년, 허쉬 산업 학교는 밀턴 허쉬 학교로 이름으로 변경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밀턴 허쉬 학교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기숙학교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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